파씨의 입문_황정은 소설집|지독한 외로움과 죽음 그리고 지옥 같은 삶에서 나는 어떤 걸 느꼈을까.
파씨의 입문은 내가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 독립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아니 우연히 찾은 책이라 할 수 없겠다.
파씨의 입문은 눈에 잘 보이지 않은 무릎 아래쪽에 있는 책이었다. 사실 제목만 봐서는 언뜻 내용이 유추되지 않아 평소라면 그냥 쓱 지나쳤을 텐데 이 날은 왠지 이 책 저 책 꺼내서 한 페이지라도 읽어보고 싶었다.
파씨의 입문에 이렇게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 등장인물을 한 씨, 고씨, 묘씨(심지어 묘씨는 고양이다), 디디, 도도로 명명해 독특했다.
- 1인칭 시점으로 상황 묘사가 자세해 몰입감이 굉장하다.
- 죽음에 대한 주제를 깔고 있어 단편인데도 2편 이상 한 번에 못 읽을 만큼 무겁다.
한번 읽은 것으로 책의 내용과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한 번만 읽어도 남는 게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쓰신 분은 어떤 분이실까.
문체만 놓고 보면 천재가 아니실까.
내용을 보면 기나긴 외로움을 쌓아오신 분이 아니실까.
존경스럽다.
파씨의 입문 후기
야행, 대니 드비토, 낙하하다까지 읽고 이 책에 대한 '작가의 말'이 너무 궁금해졌다.
작가님은 어떤 생각, 마음으로 이 책을 쓰게 된 걸까?
뭔가 죽음이라는 주제가 책을 관통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일반적이지 않았다.
내가 자주 보았던 책에서는 서사의 끝이 죽음이라던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어떤 인물의 인생이라던가를 얘기하면서 삶의 의미를 말하는데 이 책은 살아서의 죽음, 죽어서의 죽음 그래서 그냥 죽음 혹인 지옥 같은 삶 자체를 말하는 것 같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프고 무거웠다.
9개의 단편 중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것은 대니 드비토, 낙하하다, 뼈 도둑이다.
대니 드비토와 낙하하다는 주인공의 죽음 이후 상황에서 1인칭 시점으로 묘사를 하는데 너무 생생하달까. 저런 죽음의 세계가 있다면 너무 지독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나에게 꽤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뼈 도둑은 하.. 이 지독한 사람. 주인공의 공허함, 그리움, 무기력함이 너무 절절하게 느껴져 가장 가슴 아프게 읽었다.
<여기서부터는 책의 일부 내용을 발췌한 글과 간단한 줄거리가 적혀있다.>
대니 드비토
예전에, 유도 씨와 나는 둘 중 하나가 먼저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워 있다가 내가 말했다.
난 죽을 거야.
뭐야.
쓸쓸해서 죽을 거야.
무슨 말이야.
만약에 유도 씨가 먼저 죽으면 나 시들어 죽을 거야.
아, 뭐 또,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해.
유도 씨가 죽고 없는 세상을 생각해 봤는데, 안 되겠어. 혼자서 굉장히 쓸쓸할 테고, 도무지 자신이 없어
죽겠다고 간단하게 죽을 수 있겠냐, 사람이.
하여간 그래.
얼른 자.
유도 씨는 어때.
뭐가.
내가 먼저 죽었다고 생각해 봐.
그야, 살겠지.
뭣이.
어떻게든 살겠지.
그렇지만 살아도 사는 게 아니겠지, 히히히.
그러면 내가 먼저 죽자.
얘기가 왜 그렇게 돼.
몰라, 잔소리하지 마. 어쨌든 죽으면 틀림없이 유도 씨한테 붙을 거다. 난 죽어서도 쓸쓸할 테니까, 유도 씨가 반드시 붙여줘야 돼.
응. 얼마든지 붙어.
-41p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죽은 상태라는 것을.
자신의 집에는 복자라는 고양이만 있고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웅웅 울리고 있다.
유라는 유도를 기다린다.
유도는 집으로 들어와 혼자인 게 익숙한 듯 씻고 식사를 하고 자고 출근을 한다.
유라는 젤리처럼 유도의 머리에 붙어있기도 하고 흘러 내려와 어깨에 붙어있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유도는 미라를 만나 재혼을 한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미라의 죽음을 보고 그 자신도 늙어간다.
유라는 유도의 삶을 옆에서 지켜본다.
그리고 점성이 떨어진 젤리처럼 점점 흐려진다.
그저 바랄 뿐이었다.
유도 씨가 죽은 직후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유도 씨가 죽고 난 다음엔 무엇으로도 남지 않기를.
말끔히 사라질 수 있기를.
-57p
낙하하다
야노 씨가 말해주었다.
애초 빗방울이란 허공을 떨어져 내리고 있을 뿐이니 사람들이 빗소리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빗소리라기보다는 빗방울에 얻어맞은 물질의 소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런 물질에도 닿지 못하는 빗방울이란 하염없이 떨어져 내릴 뿐이라는 이야기였다.
생각해 보세요. 야노 씨는 말했다.
허공을 낙하하고 있을 뿐인 빗방울들을 생각해 보세요.
우주처럼 무한한 공간을 끝도 없이 낙하할 뿐인 빗방울을.
-66p
끝도 없이 떨어지고 있다.
이렇게 떨어진 지는 아마 3년쯤 됐을 것이다.
30년이라고 하기엔 너무 길고, 3일이라기엔 너무 짧고 아마 3년쯤일 것이다.
차라리 어디에 부딪힌다면 끝을 알 수 있을 텐데.
상승하고 있는 것인지 하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떨어지고 있다.
이곳은 지옥일까.
제발 어딘가에라도 부딪혔으면 좋겠다.
이곳은 너무 외롭다.
외롭고 두려운 것도 관성이 되었다.
관성적으로 외롭고 두렵다.
외롭고 두렵고 무엇보다도 지루하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진다.
-77p
뼈 도둑
샛별이 떴을 때 그는 집을 나섰다.
공기를 들이마시자 폐 가장자리가 가볍게 어는 듯했다. 무릎을 들어 눈 위에 발을 얹고 무게를 얹었다.
발이 눈 속으로 깊이 묻혔다. 물기가 별로 없이 팍팍한 눈이라 걷기에 나쁘지 않았다.
발을 올리고 그다음 발을 내려놓았다. 다음 발, 그다음 발.
그는 머리를 감싼 모자 속으로 메아리치는 숨소리를 들었다. 하, 후, 하, 후
그는 상상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텅 빈 납골당으로 들어서는 사람, 눈사람과도 같은 거인, 그의 등과 머리에 쌓인 눈, 체온의 냄새.
한발 한발 전진해갈 때마다 그는 그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에 관한 꿈으로 완전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그는 갈 수 있었고, 살 수 있었다.
하.
후.
하.
그대는 이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205p
연인의 죽음 이후 삶의 의지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 그다.
눈이 내리던 겨울날 산속 깊은 외딴집으로 이사를 온다.
흉가나 다름이 없는 그 집에서 모닥불만 피워놓고 지낸다.
그리고 폭설이 내리던 그날 그는 연인의 뼈 조각을 찾으러 납골당까지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장의 뼈 한 조각만.
뼈 한 조각만 있었으면 그는 살 수 있었을까.
그는 눈 속에서 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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