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증명_최진영 소설|천 년 후에는 아꼬운 당신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소문으로 들은 '구의 증명'은 사랑한 연인이 죽자 그의 몸을 먹어버린 이의 이야기였다.
소설이지만 사람을 먹는다는 게 괴이하고 꺼림칙해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기분에서인지 구의 증명을 읽게 됐고 이 책이 단순히 '연인의 죽은 몸을 먹었다'로 함축될 이야기가 아님을 깨달았다.
책의 첫 페이지에는 '구'가 죽은 이후 '담'이 쓴 글이 나온다.
○
천년 후에도 사람이 존재할까?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그때가 천년 후라면 좋겠다.
나는 아주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인간이란 생명체가 우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그날까지.
인류 최후의 1인이 되고 싶다는 말이다.
이것이 내 유일한 소원이다.
궁금하다. 천년 후 사람들은 과연 어떤 일에 충격을 받을지, 혐오를 느낄지, 공포를 느끼고, 불안해할지, 모멸감에 빠질지.
어떤 일을 비난하고 조롱할지.
어떤 자를 미친 자라고 부를지.
어떤 이야기에 공감하고 무엇을 갈망할지.
천년 후의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그때에도 돈이 존재를 결정할까.
대체 뭘 먹고살까.
지금의 '인간적'이라는 말과 천년 후의 '인간적'이라는 말은 얼마나 다를까...
천년 후 사람들은 지금과 완전히 다르리라 믿고 싶다.
아니, 천년 후에는 글을 쓰고 읽는 인류 따위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다. 글을 쓰고 읽는 인간으로서, 내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나는 그만큼,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구의 증명 7~9p
'담'은 죽은 연인을 너무 사랑해서 그를 먹었나?
...
사람을 먹은 '담'을 이해할 수 있나?
...
'구'는 사람이었나?
...
오디오 북으로 읽고 종이 책으로 두 번 읽은 지금 '구의 증명'이 이렇게 소문났으면 좋겠다.
'담'에게는 '구'라는 아꼬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에게 전부였고 네가 나였기에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둘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고, 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둘은 썩은 고목나무속에 숨어 사는 청설모가 되자고.
영영 헤어지는 것보다 사람이길 포기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쁜 사람들은 용케 '구'를 찾아냈고 나는 아꼬운 당신을 잃었습니다.
나는 그의 몸이라도 영영 내 곁에 있기를 바랐지만, 작아지고 없어지는 그를 보며 너무나 아까워서 그를 먹었습니다.
그가 내 곁에 머물길 바라며.
뭐라도 말해주길 바라며.
'담'이 바라는 건 단 한 가지입니다.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 인류 최후의 1인이 되는 것.
나는 마지막으로 살아남아 '구'를 증명할 것입니다.
'구의 증명'을 읽으면서 왜 책 제목이 '담의 증명'이 아니고 구의 증명일까를 생각했었다.
주로 담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됐고 담이 구의 시체를 먹는 건 얼핏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왜 '구의 증명'일까?
뭘 증명한다는 것일까?
를 생각하며 책을 읽으니 둘의 이야기가 절절한 사랑 이야기만은 아님을 깨달았다.
○
사람이란 뭘까.
구를 먹으며 생각했다. 나는 흉악범인가. 나는 사이코인가. 나는 변태성욕자인가. 마귀인가. 야만인인가. 식인종인가.
그 어떤 범주에도 나를 완전히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인가.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무럭무럭 자라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사람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 사람은 뭐든 죽일 수 있고 먹을 수 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친다.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고 작살 낼 수 있다.
...
구는 길바닥에서 죽었다.
무엇이 구를 죽였는가.
나는 사람이길 원하는가.
-구의 증명 173~175p
구의 대한 이야기는 '구는 길바닥에서 죽었다'로 시작한다.
길바닥.
사람이 죽을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죽은 구의 몸은 상처와 멍으로 가득했다.
구는 사람답게 살고 싶었지만 그를 둘러싼 세상은 그를 사람취급하지 않았다.
그는 영혼이 없었고, 그의 몸은 물건이었다.
그를 사람취급하지 않는 이 세상은 무엇일까.
나는 그들과 같은 사람인가.
담은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구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싫어 아까운 그를 먹었다.
구는 나와 함께 있어야 하니깐. 우리는 떨어질 수 없으니깐.
나는 사람인가.
○
내겐 부활과 동정녀의 잉태가 필요하다. 윤리나 과학이 끼어들 여지없는 기적이 필요하다.
천년 후가 필요하다. 종말 혹은 영생이 필요하다. 미친 자아가 필요하다.
인간이 아닌 상태라도 좋으니, 당신이 필요하다.
믿음이 필요하다.
-구의증명 11p
구의 증명 armr_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01
네가 올 줄 알았다.
오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분명 너를 기다렸지만, 내가 죽기 전에 오길 바라는지, 죽은 후에 오길 바라는지... 혼란스러웠다.
살아있을 때도 원하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해 종종 너에게 선택을 미뤘고 핀잔을 들었는데,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나는 내 마음을 읽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죽는 모습을 너에게 보이기 미안했다. 죄스러웠다. 너에게 그런 짐을 떠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내 부재만큼이나 네 남은 생에 지우기 힘든 얼룩과 상처를 남길 테니까.
#02
방에 구를 눕히고 물을 끓였다. 뒷마당에 두었던 커다란 고무 대야를 부엌으로 끌고 와 대야 속을 깨끗이 씻었다.
그 대야에 찬물과 뜨거운 물을 적당히 섞어 넣고, 구를 넣었다. 나도 옷을 벗고 들어갔다. 천천히 구의 몸을 씻겼다. 씻다가 안았다. 안으며, 구의 팔과 등에 새겨진 내 손가락 자국이 사라지지 않았다. 구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구의 몸에 상처를 주는 것만 같았다.
#03
구를 방에 누이고 소독용 알코올로 몸 전체를 꼼꼼히 닦았다. 입속과 콧속과 배꼽과 항문까지. 다 닦았다.
손톱과 발톱을 깎아주었다. 깎인 손톱과 발톱 조각은 내가 먹었다. 머리카락을 단정히 빗겨주었다. 빠진 머리카락도 내가 먹었다. 꿀꺽 삼켰다. 작은 구는 그새 더 작아져버렸다. 가만히 앉아서 외로운 빛으로 변해가는 구의 몸을 바라봤다.
#04
문짝이 날아갈 것처럼 바람이 거세다. 거울을 본 지 오래되었다. 내가 박살 냈는데, 어느 밤인지 모르겠다. 내 얼굴을 비추는 모든 것을 박살 냈다. 구는 아마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을씨년스러운 이 방을. 엉망이 되어버린 우리의 잠자리를.
내 몰골은 아마 멧돼지와 한판 붙었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살쾡이 같겠지.
보기에 좋지 않지?
좋지 않은 식으로라도, 내게 신호를 보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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