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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그림자_황정은 장편소설|나는 당신의 마음이 불편하길 바랍니다.

grayish 2025. 2. 19.

황정은 작가님의 소설집 '파씨의 입문'을 굉장히 인상 깊게 읽은 후 '다른 책도 읽어 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한편에 있었다.

그런데 선뜻 읽지 못했던 건 '파씨의 입문'이 남긴 여운이 아직도 진하게 남아서다.

그 책을 떠올리면 먹먹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아직 이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그냥 두고 있다.

 

오랜만에 들린 독립서점에서 황정은 작가님의 다른 소설책을 보았다.

백의 그림자와 디디의 우산. 

백의 그림자에 먼저 손이 갔고 첫 장을 읽으니 안 가져갈 수가 없었다.

 

다음 독서모임에 백의 그림자를 읽었고 또다시 먹먹함이 밀려들어왔다. 

뭘까.

왜일까.

...

..

한참을 곱씹어 생각해 본다.

 

 

책 뒷면에 적힌 문장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은교가 숲에서 본 그림자를 따라 덤불을 헤치고 들어간다.

숲은 깊어지는데 그림자의 뒷모습에 이끌려 자꾸자꾸 들어간다.

은교 씨, 어디 가요.

그냥 가는데요.

어디를요.

따라가고 있거든요.

누구를요.

저 사람을, 하면서 앞을 보니 그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

 

책의 제목인 '백의 그림자'에 백은 일백백(百)이다. 

백개의 그림자라는 뜻이겠지.

백명의 그림자 인가?

아니, 백만큼 많은 이의 그림자 인가?

 

 

각 차례를 지나면서 등장인물들이 새로이 등장하고 그들이 겪은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무재의 이야기>

소년 무재가 살았습니다. 무재의 식구들은 그림 한 점 없는 커다란 방에서 살았습니다. 식구는 아홉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고 누나가 여섯이었습니다.
...
소년 무재의 부모가 을 집니다.
이 경우엔 다른 사람의 종이에 이름을 적어준 대가로 얻은 빚입니다. 빚의 규모가 너무 커서 빚보다는 빚의 이자를 갚느라고 힘든 노동을 하는 와중에 아홉 식구의 생활비도 버는 생활을 하다가 소년 무재의 아버지의 그림자가 끝끝내 일어서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
그림자가 일어서고 말았다니 그래서 그림자를 따라갔나요, 당신 그림자를 따라갔나요.라고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소년 무재의 아버지는 고객을 끄덕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따라갔나요.라고 소년 무재의 어머니가 묻자 그는 조금 따라갔어, 아주 조금만 따라갔어,라고 대답합니다. 
.
그날 이후로 소년 무재의 아버지는 아무래도 남몰래 그림자를 따라가거나 하는 듯 별로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면서 나날이 핼쑥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어딘가에서 다름없는 자신의 모습을 목격했다면 그것은 그림자, 그림자라는 것은 한번 일어서기 시작하면 참으로 집요하기 때문에 그 몸은 만사 끝장, 일단 일어선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으니 살 수가 없다,는 둥의 이야기를 아무 곳에서나 불쑥 말하곤 하다가 그는 귀신같은 모습이 되어 죽고 맙니다. 

 

그림자가 일어선다.

그림자는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림자를 따라가면 정신을 놓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림자에 대해 한참을 생각해 본다.

그림자란 뭘까.

그림자는 왜 일어설까.

그림자를 따라가면 왜 넋을 놓을까.

 

쉽게 답할 수 없는 물음이 가슴에 쿵하고 내려앉아 마음이 다시 먹먹해진다.  

 

 

소설 끝에는 작가님의 후기가 적혀있다. 

'좋아할 수 있는 것들'

'폭력적인 세계'

'곁에 있는 것에 위로'

를 되뇌어 본다.

..

.

차별, 혐오, 소외되는 것에 대해 사실 생각해보지 않고 살았다.

하지만 먹먹해진 마음에서 이미 내 속에 들어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좀 더 오래 머물길. 

오래 머물러서 싹을 틔우길.

바라본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이 용산 참사 현장임을 후기 글을 통해 알았다. 

사실 용산 참사가 어떤 사건인지 몰라 나무위키를 찾아봤다.

'재개발' '전자상가' '시위' '화염병' '화재' '6명의 사망자'

얽히고설킨 말의 밀도가 높아 차마 내 머리로 어떤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죽은 이들이 안타까웠고, 그 처절한 현실에 마음이 아팠다.

마음이 안 좋았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불편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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